삼성 20조·SK하이닉스 5조…한전, '전기료 선납' 제안
박정아 기자2026.09.05

5년치 요금 미리 받아 용인·호남 전력망 건설 재원으로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향후 5년치 전기요금 약 25조 원을 미리 납부해달라고 제안했다.
3일 전력 업계와 한전에 따르면 한전은 삼성전자에 약 20조 원, SK하이닉스에 약 5조 원 규모의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제시하고 세부 조건을 협의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낸 전기요금 4조1000억 원, SK하이닉스가 낸 9000억 원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산정한 것이다.
한전은 이렇게 확보한 자금을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송·변전망 등 전력 인프라 구축에 투입한다는 구상이다.
해당 클러스터가 2040년까지 필요로 하는 추가 전력은 20.6기가와트(GW)로, 원자력발전소 약 20기 분량에 해당하는 규모다.
국고채보다 높고 한전채보다 낮은 이자…"기업엔 사실상 요금 할인"
한전이 제시한 조건도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한전은 선납금에 대해 국고채 2년물 금리보다 높고 한전채 2년물 금리보다는 낮은 수준의 이자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국고채 2년물 금리는 약 3.4%, 한전채 2년물 금리는 약 3.7% 수준이다.
다른 보도에 따르면 국고채 금리에 0.15%포인트를 더하는 안이 거론되고 있다. 이자는 현금으로 지급하는 대신 6개월(반기)마다 납부해야 할 전기요금에서 차감하는 방식이 검토되고 있는데, 이는 기업 입장에서 전기요금을 미리 내는 대신 해당 금리만큼 사실상 요금을 할인받는 구조다.
한전 관계자는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전기요금 선납제를 통한 전력인프라 투자 확대' 토론회에서 양사로부터 2027년 말까지 월 2조 원가량씩 나눠 받으면 약 1년치 차입을 대체하고, 사채발행배수(자본금·적립금 대비 한전채 발행 잔액)를 2배 이내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한전 부채 210조7000억 원…"하루 이자만 115억 원"
한전이 이례적인 대규모 선납을 제안한 배경에는 심각한 재무 압박이 자리 잡고 있다.
한전의 총부채는 지난 6월 말 기준 210조7000억 원에 달하며, 이자 비용만 하루 평균 약 115억 원에 이른다.
자금조달 여건은 앞으로 더 빡빡해질 전망이다.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최대 5배까지 허용하는 특례가 내년 말 종료되면, 2028년부터는 발행 한도가 다시 2배로 축소된다.
반면 정부의 '3대 메가프로젝트' 등 대규모 투자 계획으로 전력 수요는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달 20일 공개된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2040년 최대전력 수요 전망치는 기존 전망보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부문에서 20.6GW, 데이터센터 부문에서 7.9GW 상향 조정됐다.
한전은 전기요금 선납을 통해 사채 발행 의존도를 낮추면서 전력망 투자 재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청와대까지 보고된 사안…7월부터 논의 급물살
이번 방안은 상당 기간 물밑에서 조율돼 온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7월 기획재정부 국고실장과 국채정책과장이 한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고위 관계자를 만나 관련 면담을 진행하면서 논의가 본격화됐고, 같은 달 말에는 청와대에도 관련 내용이 보고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전기요금 선납제 자체는 이미 존재하는 제도로, 한전은 정부기관과 군부대 등을 대상으로 연간 3500억~3900억 원 규모의 전기요금을 미리 받고 있다.
다만 이자율이나 사용 목적 등 세부 기준이 부족한 만큼, 이를 명확히 규정하는 한전법·전기사업법 개정안(박정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돼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 중이다.
개정안에는 한전이 선수금을 전력망 확충 등 대통령령으로 정한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삼성·하이닉스 "이자율 더 높여달라"…금액 놓고도 줄다리기
기업들 역시 내부적으로 검토에 들어갔지만, 조건을 둘러싼 신경전도 감지된다.
한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두 회사 모두 이자율을 좀 더 높여 회사채 금리 수준까지 적용해달라는 의견을 내고 있고, 특히 삼성전자는 20조 원이라는 금액 자체가 큰 만큼 선납 규모에 대해서도 별도로 협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이 제도가 전력망 확충이 시급한 기업과 투자재원이 필요한 한전이 서로의 필요를 보완해주는 방식이라며, 국가적으로도 한전채가 흡수하던 시중자금이 민간부문으로 흘러가 중소·중견기업을 포함한 국내 기업 전반의 채권 발행 여력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공공기관 개혁과 시기 겹쳐…"근본 해법 아니다" 신중론도
이번 제안은 공교롭게도 정부가 발전 공기업 통폐합 등을 담은 '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방안'을 발표한 시점과 맞물려 나왔다.
정부는 지난 3일 한전의 5개 발전자회사를 단일법인 '한국발전(가칭)'으로,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를 '에너지자원공사(가칭)'로 통합하는 개편안을 발표했는데, 이번 개편으로 524개였던 공공기관은 415개로 109개 줄어든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선납 협상이 한전의 대안적 자금 조달 시도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나증권은 해당 선급금이 실현되더라도 회계상 근본적인 재무구조 개선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기업 참여 여부와 세부 조건이 언제 최종 확정될까
전문가들은 선납 규모와 기간, 이자율, 기업의 실제 참여 여부 등 구체적인 조건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만큼, 향후 협상 결과에 따라 실제 자금 조달 효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전으로서는 회사채 발행보다 낮은 비용으로 대규모 자금을 조달할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기업들이 요구하는 이자율 인상 폭을 얼마나 수용할지가 협상의 최대 관건으로 꼽힌다.
관련 법 개정 논의와 맞물려 이 제도가 실제로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망 구축의 안정적 재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